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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기구들 코로나 성적표는 D…라이트펀드 역할 많다”

[DP인터뷰]김한이 보건기술연구기금 대표
“코로나 백신·진단키트, 소수에 집중 배분…중저소득 국가는 소외돼”
“라이트펀드, 아프리카·남미에 실질적 도움되는 의료기술 지원할 것”

[데일리팜=김진구 기자] 3년 가까이 장기화하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국제기구들의 역할론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류가 공통으로 맞이한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긴급하게 개발된 백신과 진단키트는 힘의 논리에 의해 고소득 국가 위주로 분배됐다. 국제사회의 협력은 사라졌고 보건의료 기술의 공공성을 논하던 국제기구들은 이 과정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중저소득 국가들은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최근 외교부 초정으로 한국을 찾은 아흐메드 오우마 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 소장대행은 “코로나 기간 동안 아프리카가 얻은 교훈은 국제적인 위기가 발생했을 때 결국 아프리카는 혼자 남게 된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엔데믹을 바라보는 현 시점에서 전 세계 공공보건 전문가들은 국제기구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제기구들이 민간 주도로 개발된 보건의료 기술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했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선 애초에 보건의료 기술의 형평적인 분배를 염두에 두고 중저소득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뿌리 단계부터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김한이(50)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펀드, RIGHT Fund) 대표이사는 최근 기자와 만나 “코로나 사태에서 확인한 보건의료 기술의 불형평적(inequity)인 배분은 결국 물질적 자원과 지식의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보건의료 기술은 혁신을 추구해야 함과 동시에 사회 구조 내에서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를 위해선 기술을 필요로 하는 주체에 의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며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은 중저소득 국가의 니즈를 파악하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을 위해 한국기업의 국제 협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대표와의 일문일답.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은 세 개의 축으로 조성된 재단법인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의 생명과학 기업들, 그리고 미국 빌&멜린다게이츠 재단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국제보건 분야의 연구를 위해 지원한다. 현재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한국기업은 종근당·GC녹십자·제넥신·KT·LG화학·SK바이오사이언스·SD바이오센서·바이오니어·유바이오로직스·큐라티스 등이다.

조성된 기금은 국제보건 향상과 형평성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쓰인다. 중저소득 국가에서 발생하는 풍토병과 신종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백신·치료제·진단·디지털헬스 등 분야의 기술 고도화를 지원한다. 지난해 말 기준 누적 38건의 연구과제가 선정돼 총 438억원을 지원했다.”

-글로벌 팬데믹 사태가 어느덧 3년차를 맞았다. 그간 국제기구 혹은 비영리재단들의 활동을 평가한다면.

“성적표를 줘야 한다면 ‘D’를 줄 것이다. 한 마디로 아주 못했다는 평가다. 이런 평가는 개인적인 관점뿐 아니라 글로벌 공공보건 전문가들도 공감하고 있다. 많은 논문이 문제를 지적한다. 그간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생겨난 수많은 기구들이 정작 코로나 사태가 터진 뒤로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보건 자원의 분배에 형평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형평은 균등이나 평등과는 다른 개념이다. 코로나 사태가 팬데믹으로 치닫고 각국이 코로나 백신·치료제·진단키트를 앞 다퉈 구하는 상황에서 거의 모든 자원은 고소득 국가에 집중됐다. 코로나 1·2년차뿐 아니라 3년차에 들어선 올해의 경우도 이러한 상황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제기구들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전 세계 공공보건 전문가들이 이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논의 중이며, 힘의 논리에 의해 자원이 배분되는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있다.”

-보건 자원의 불형평성을 언급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또,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정학적 원인을 짚고 싶다. 보건자원의 국제 배분 논의는 대부분 고소득 국가에서 이뤄진다. 세계보건기구(WHO)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혹은 UN 본부가 있는 뉴욕에서, 혹은 혹은 빌앤멀린다게이츠 재단이 있는 시애틀에서 이뤄진다.

힘의 논리가 실린 결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중저소득 지역인 아프리카나 남미의 목소리는 반영되기 힘들다. 말로는 공익성을 추구하는데 막상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중저소득 국가로 자원이 배분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탈중앙화(decentralized)’다. 탑다운 방식의 의사결정이 내려져선 안 된다. 아프리카를 예로 들면 아프리카 전체의 방역과 대응을 관리하는 Africa CDC(아프리카 질병통제예방센터)에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라면 PAHO에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불형평성을 경험하는 해당 지역에서 직접 해법을 찾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도와야 한다.”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직 규모가 크지 않은 신생 재단으로서 범국가적 국제기구들의 역할과의 차별점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

“재단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려고 한다. 국제기관들은 한국의 코로나 사태 대처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한국의 대처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 비결에 대해 궁금해 한다.

다양한 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보건의료 체계가 훌륭하게 구축돼 있고, 혁신을 추구하는 연구개발에 활발히 뛰어들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시스템과 연구개발 역량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글로벌 무대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저력 있는 기업·연구소에 대해 관심이 많다. 우리는 국제기구와 한국기업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한국의 또 다른 강점은 중저소득 국가로서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매우 희귀한 경험이다. 한국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다. 동시에 불과 수십 년 전 빈곤했던 경험도 있다. 대부분 중저소득 국가가 처한 현실을 헤쳐 나온 저력이 있다.

기존 선진국들이 국제보건 파트에서 수없이 연구해오고 있으나 여전히 중저소득 국가와의 연대와 협력이 부족하다. 한국은 이러한 연대와 협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학습이 아닌 경험으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밑바탕이 돼 궁극적으로 중저소득 국가와 함께 연대, 협력하며 실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새 대표로 취임한 지 1년여가 지났다. 향후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지난 3년간 우리는 제품 개발이나 연구를 지원했다.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한다. 새로운 전략을 네 가지 방향으로 정했다.

첫째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품개발과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의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제품이나 연구가 단순히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느냐보다는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단순히 규제기관의 허가를 받는 데 치중하기 보단, WHO 공공조달시스템을 통해 중저소득 국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둘째는 국제 협력이다. 지금까지는 ‘국제 협력을 하면 좋지만 필요하진 않다’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러나 국제 협력은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역할과 위치를 국제적인 조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

셋째는 공공성의 평가다. 제품 혹은 연구가 얼마만큼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갖고 있는지 근거 자료가 필요하다. 한국의 시선에서 중저소득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바라봐선 안 된다.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귀기울이고 근거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근거생성연구비 지원 사업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은 인력 양성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로컬의 자체적인 인력 양성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 일환으로 한국 정부는 지난해 겨울 WHO로부터 백신·바이오 인력양성 허브라는 역할을 맡았다. 복지부와 함께 이 부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공공성을 평가한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최근 재단은 ‘근거생성 연구비(Evidence Generation Award)’ 지원사업 공고를 냈다. 전 세계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사업이다. 이번에 초점을 둔 분야는 디지털 헬스케어 부문이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궁금해 하는 것이 과연 디지털 헬스케어가 공중보건 증진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는지다. 아직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 잠재적으로 공중보건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추측이 있는 반면, 글로벌 보건의료 형평성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추측도 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디지털 기기가 어떻게 쓰였으며, 각국의 보건 증진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평가하고자 한다. 도움이 됐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환경에서 기여를 했는지 파악해야 한다. 명확한 근거 없이 단순히 ‘케냐에선 도움이 됐다’는 식의 결론은 곤란하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얼마나 도움이 됐고 또 어떤 부분에선 미흡했는지 파악이 돼야 이에 따른 지역기반 공공재 개발이 가능하다고 본다.

특정 제품이 개발돼 전 세계에서 사용되기 위해선 WHO의 사전적격성 심사(PQ)와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제품이 고소득 국가뿐 아니라 중저소득 국가에서도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확한 근거를 필요로 한다.”

-김한이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 대표 약력.